[플레이오프] 수원 vs 포항 잡담

2006-11-29 23:16:34, Hit : 3498, IP : 220.94.20.***

작성자 : toto
[링크] 자유게시판 [2006/11/13]


0.

시간이 없어서 재방송도 못 보고 기억에 의존해 휘갈겨 씁니다.


1.

12일 빅버드에서 수원과 포항의 플레이 오프 경기가 있었습니다. 플레이 오프라는 것 말고도 수원의 이번시즌 홈 무패와 포항전 3전 전패라는 반대되는 징크스가 마지막 담판을 짓는 경기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2.

수원은

서동현

김대의 이현진
이관우

송종국 백지훈

곽희주 마토 이정수 조원희

포항은 김성근, 조성환, 황재원, 이창원/ 박원재, 김기동, 황지수, 오범석/ 고기구, 황진성의 442입니다.


3.

단판 승부는 결국 획기적인 전술이나 선수기용보다는 선수능력이나 조직력이 결정짓는다고 봐도 크게 틀리지 않습니다. 단적인 예가 지난 시즌 울산-인천의 결승전입니다. 리그 전체를 돌이켜 보면, 장외룡 감독에게 좀 더 좋은 점수를 줄 수 있겠지만, 결국 인천의 패배는 울산의 개인능력에 밀린 점과 장외룡 감독이 들고 나온 의외의 3백 전략이 오히려 독이 된 탓이 큽니다.

양 팀의 개인 능력치를 비슷하게 보고, 수원의 매서운 수비와 이동국이 복귀한 포항의 공격에 한 점씩 주고 나면 결국은 중원싸움이 승패를 가르는 기준이 될 걸로 예상했었는데, 이런 점에서 김남일의 부상은 수원에게는 치명적인 약점이 될 수 있습니다. 스틸야드에서 수원 미들의 압박을 짧은 원터치 패스를 통해 아예 몸싸움 자체를 피하고, 중원에서의 경기 스피드를 빠르게 가져가면서 이겨낸 포항을 생각하면 중원에서 김남일의 부재에 대한 유일한 대안은 김진우 뿐입니다. 결국 김진우 카드는 당연히 나와야 하는 것, 문제는 어떻게 효과적으로 패를 던지느냐입니다.

경기전 대부분이 김진우의 선발을 예상했지만, 차감독은 김진우를 소위 말하는 '마지막 조각'으로 아껴둔 것 같습니다. 김진우를 전후반 풀로 뛰게하면 체력문제로 결국 언젠가는 틈이 생기는 것을 감수해야 합니다. 만약 김남일이 있다면 커버가능하지만, 불행히도 송종국은(좋은 선수지만) 김남일과는 역할 자체가 다릅니다.

통속적으로 말하자면 길고 가늘게 쓰느냐 아니면 짧고 굵게 쓰느냐입니다. 차감독으로서는 전반만 실점하지 않고 버틴다면 후반 김진우를 투입하고 이관우를 사이드로 올리면서 한 골 승부내기로 시나리오를 짠 모양인데 결론적으로 이게 들어 맞았습니다.


4.

전반은 슈팅수 3:2가 말해주듯 치열한 미들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전문 수비미들이 없는 수원이 미들에서 이 정도 해준 것은 최대한 양 풀백이 오버래핑을 자제하고(조원희는 종종 나가기는 했습니다만) 이현진과 김대의가 내려와서 미들을 두텁게 해준 게 유효했습니다.

미들에서 수원이 나름 잘해줄 수 있었던 것은 다음과 같은 이유입니다.

수원에서 스피드 있는 자원이라고 하면 김대의, 이현진, 데니스 정도일텐데 이 세 명이 어제 선발과 서브에 모두 있었습니다. 올리베라가 부상으로 빠지면서 당연히 서동현이 원톱으로 나올테고, 김대의가 한 쪽에 서면 반대편에 이관우를 올릴 수 있었겠지만 이현진이 선발입니다. 냉정하게 말하면 플레이 오프에서 풀타임 뛸만큼 이현진 선수가 신임받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결국 처음부터 후반전 이현진 선수의 교체를 염두에 두고 뛰게 한 것으로 봐야 합니다.

김대의와 이현진의 스피드라면 포항의 수비진이 올라오지 못하게 할 수 있을 뿐더러 후반전에 타격이 될만큼 지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최선의 수비는 공격, 이것이 어제 양 사이드(특히 이현진)의 최우선입니다. 골을 넣는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아니라도 상관없다, 포항의 2선과 3선의 공격가담을 최소화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이라는 의도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최광보 주심입니다. 이게 수원편향이라는 말이 아니라 주심이 어제 작정하고 나온 듯 왠만한 몸싸움은 그냥 넘기며 경기를 끊지 않으려고 했는데, 이게 몸싸움에 능한 수원에 유리하게 작용했다는 겁니다.


5.

전반전 가장 좋았던 찬스는 수원에서 조원희가 수비를 따돌리고 올려준 것은 김대의가 헤딩한 장면이고, 포항도 오범석의 터닝 슛이 아주 아까웠습니다. 슈팅 수가 적어서 그렇지 면면을 보면 수준 높은 경기입니다만, 이것과는 별개로 재미있는 경기는 아닙니다.

단판승부라 어느 팀이든 쉽사리 공격적으로 나가기는 힘들어서, 수비지향적인 탓도 있지만 포항과 수원은 서로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것도 한 몫을 했습니다. 물론 이런 경기에서 한 골 터지면 간혹 밀란 더비나 수원/성남전처럼 흘러 가기도 합니다만 화끈한 경기는 역시 기대하기 어렵습니다.


6.

후반 시작하고 예상대로 이현진 OUT, 김진우 IN입니다.

어제 같은 경기에서 mom을 한 명 가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그리고 누구는 마토를 누구는 백지훈을 또는 박호진 등등을 말하겠지만, 차범근 감독의 히든카드, 마지막 한 조각은 바로 김진우였습니다. 김진우의 투입이 흐름을 바꾸었고 중원을 장악했으며 무엇보다 백지훈과 이관우가 수비에서 벗어나 포항 수비진을 헤집기 시작했습니다.

이것과 대척점에 있는 것이 김기동입니다. 이 72년생 포항의 살림꾼, 나이를 가늠할 수 없는 플레이를 보여주는 선수도 전후반을 똑같이 뛰는 것은 역시 무리입니다. 만약 포항이 김기동을 아낄 수 있었다면, 김진우처럼 사용했더라면 경기가 다르게 흘러갔을 수도 있습니다. 후반에 김진우가 포항의 패스란 패스는 다 끊어주는 반면 김기동은 확실히 지쳐보였습니다.

후반 10분쯤 황지수가 슬라이딩 태클로 걷어내려던 공을 백지훈이 가로채 포항쪽으로 몰고 가더니 수비진 사이의 틈을 뚫고 그대로 중거리 슛을 때립니다. 20m는 넘어 보이는 거리였는데도 백지훈의 발등에 맞는 순간 들어간다고 직감했습니다. 경기장에서 볼 때는 그대로 들어간 걸로 보였는데 나중에 리플레이를 보니 윗쪽 골포스트 맞고 들어갔습니다.



결승골의 사나이... 파랑새 백지훈


백지훈이 상암에서 3년간 3골 넣은 걸로 알고 있는데 수원 와서는 벌써 6골입니다. 거기다 결승골 아니면 이주의 골 후보 뿐입니다. 골든 보이? 레인 메이커? 뭐라고 불러야 할지. 골을 잘 넣을 뿐 아니라 경기력도 좋아졌습니다. 상암에서 히칼도 뒤에서 주눅든 플레이를 하던 소년은 사라지고, 지금은 에시앙의 목을 잡아채는(!) 투지를 가진, 계속 성장하는, 넘어져도 일어나는 축구선수가 있을 뿐입니다.


7.

빅버드에서 선취골을 넣고 지는 것은 확률적으로 아주 어려운 일이지만, 수원이 추가 득점을 하는 것도 그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즉, 남은 35분을 수원 관중들이 덜컥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1분마다 시계를 보면서 경기를 봐야한다는 말입니다. :-)

그리고 포항도 승부를 띄웁니다. 이창원 out, 이동국 in. 7개월간 그라운드를 떠났던 선수지만 복귀 2경기만에 골을 넣은 선수이기도 합니다. 거기다 이 선수 확실히 몸상태나 슛 감각은 부상 전만 못하지만, 경기를 보는 시야나 주변의 선수를 활용하는 능력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아마 이동국이 조금만 더 빨리 복귀했더라면, 2-3경기만 더 뛸 수 있었다면 경기결과는 바뀌었을 수도 있습니다.
김기동에게 공을 어시스트 한 것도 이동국이었고, 수원의 마토, 이정수를 상대로 몸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공격수를 보는 것도 오랜만이었습니다. :-)

재미있게도 이동국이 들어오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수원에서 김대의를 빼고 싸빅을 넣습니다. 이건 저쪽이 장군하니 허허거리며 멍군하는 겁니다. 결과적으로 말하면 이게 Checkmate입니다. 고기구-황진성이라면 마토,이정수가 쉽게 막지만 이동국을 막으려면 역시 마토-싸빅이 제격입니다. 싸빅이 들어온 것은 잠그기라기 보다는 이동국의 투입에 대한 수원의 적절한 대처라는 말이 맞습니다. 이후 수원은 마토-싸빅-이정수가 서고 조원희를 오른쪽 미들로 올립니다.


8.

포항은 따바레즈와 프론티니라는 가능한 공격진을 모두 넣었지만 수원의 수비진은 꿈쩍도 않습니다. 어제 후반전 수원의 수비진은 결점을 꼬집어 말하기 어려울 정도로, 마토-싸빅의 높이와 노련함, 이정수-곽희주의 맨투맨과 스피드는 그야말로 사기유닛입니다. 곽희주가 눈에 띄지 않게 안정적이라면, 이정수는 실수를 해도 순간스피드와 민첩함으로 바로 커버를 하는 모습이 인상적었는데 이정수가 어제 막아낸 위험한 상황이 몇 개인지 모릅니다.

수비진에서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은 예, 박호진입니다. 이동국의 패스를 받은 김기동의 슛은 맞는 순간 실점이라고 생각했는데, 박호진이 몸을 날려서 아슬아슬하게 손끝으로 쳐내는 것을 보고 이겼다고 생각했습니다. 초반 긴장한 탓인지 실수 몇 개가 눈에 보였는데(마토가 걷어낸 골킥 미스도 그렇고) 역동작에 걸렸음에도 불구하고 반대편 골대까지 몸을 날리는 이 선방은 동물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습니다.



오랜 동면을 깨고 우뚝 솟은 박호진



9.

포항은 공격이 강하다고 생각했었는데 오히려 수비진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서동현이 헤딩 경합에서 전혀 힘을 쓰지 못하게 만든 김성근과 조성환의 위치선정과 점프력도 좋았고 박원재의 왼쪽 오버래핑도 위협적이었습니다. 오범석은 관대한(!) 심판에게 옐로 카드를 받을 정도로 터프했는데, 사실 그 백태클은 터프라고 넘기기는 좀 그렇습니다.

뭐 이건 넘어가고...정성룡 선수는 1년에 한 번 하는 선방(^^)을 지난 수원전에 해서 그런지 어제는 그냥 그렇습니다. 하긴 백지훈 선수의 슛은 못 막았다고 핀잔 줄 수 없는 골이긴 합니다만.


10.

경기 끝나고 포항 선수들은 모두 쓰러져있고 수원 선수들은 서로 껴안고 승리를 기뻐합니다. 어제 선수들 중에 김진우와 김대의, 데니스, 이운재 등을 제외하면 자신들이 우승을 이끌어 본 사람은 없습니다. 우승이 한 발 더 다가왔다는 것은, 진짜 우승할 수 있다는 실감은 선수와 서포터 모두를 들뜨게 합니다.

헌데 우습게도 제가 떠올린 것은 수원의 소위 'loosing season'입니다.

닉 혼비가 피버피치에서 이야기한 'loosing season'은 우승보다 팀과 서포터를 가깝게 만듭니다. 그 기나긴 암울한 시간을, 승리보다 패배가 익숙한 순간을 견디고 견뎌서 온 기쁨은 또다시 다가올(!) 더욱 긴 우울한 시간을 참아내게 합니다. 물론 패배가 많다고 해서 그게 loosing season은 아닙니다. 레딩이 100년 동안 하부리그에 있었다고 해서, 광주가 매 시즌 하위권에 있다고 해서 그 팀 서포터들이 그게 다 loosing season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을 겁니다. 어이 없는 패배, 무기력한 플레이, 감독과 서포터들은 서로를 미워하고, 부상선수들은 넘쳐나고... 무엇을 해도 풀리지 않는 시즌, 그게 제가 생각하는 loosing season입니다.

좋은 플레이를 하고 성적이 좋으면 클럽에 새로운 팬이 모여듭니다. 승리에 환호하다가 힘든 시기를 거치면서 남는 사람도 있고 떠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loosing season을 견뎌낸 사람만이 다음 번 승리를 맛볼 자격이 있을 겁니다.

지나간 시간을 생각하면 지금의 수원 서포터들은 말할 수 있을 겁니다.
'정말 좋아합니다. 이번엔 거짓이 아니라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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